
더뉴스인 주재영 기자 |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나는 대전 계족산 황톳길에서 한 노년의 신사를 만났다. 낯선 길에서의 인연은 짧지만 깊었다. 그분은 75세, 대장암 말기 환자였다. 평생을 공직에 몸담았고, 차관보까지 지낸 분이지만, 말년에 이르러 삶은 참 외로웠다.
그는 이미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홀몸이었다. 서울에 사는 아들과 딸, 두 자식이 있지만, 병든 아버지를 따뜻하게 맞아줄 이들은 아니었다. 냄새가 난다고 손주들은 피했고, 며느리는 문전박대를 했으며, 아들은 퉁명스러운 말만 남긴 채 외면했다.
결국 그는 조용히 집을 정리하고, 여행가방 하나에 짐을 싸들고 세상과의 작별여행을 떠났다. 연금과 정리한 재산을 바탕으로 전국을 떠돌며 과거 연애하던 경포대, 속초 등을 찾아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그리고 계족산 황톳길. 고향 인근의 요양원을 예약하고 이곳에서의 마지막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와의 만남도 그 길 위에서였다. 같은 공직자의 인연으로, 우리는 몇 번이고 황톳길을 함께 걸었고, 부추 칼국수 한 그릇에 지난날을 되새기며 웃고 울었다.
하지만 평온도 잠시, 자식들이 찾아온 후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유산을 두고 다툼만 벌이다 떠나간 자식들 뒤로, 그는 남은 삶에 대한 마지막 결심을 내렸다. 죽으면 자식들에게 알리지 말고, 유골은 계족산 깊은 곳에 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통장에 남은 돈은 요양원에 기부해 어려운 이들을 도와달라는 유언도 남겼다.
결국 그는 비 내리던 어느 날,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났다. 유언대로 요양원 원장님과 함께 화장되어 산 정상에 뿌려졌다고 한다. 장례식도, 자식의 눈물도 없었다. 그저 나, 길 위의 길손만이 빗속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분은 공직에서 성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서 그는 말없이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나는 과연 성공한 인생이었는가?”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도, 인간관계의 온기와 윤리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자식의 효도는 기대할 수 없고, 노년의 삶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되어버린 사회.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지금, 우리가 정말 선진 국민으로 살고 있는가?
냉수도 선후가 있었고, 시래기죽 한 그릇에도 겸양지덕이 깃들던 시절이 그립다. 자식을 보험처럼 키우진 않았지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예와 정은 기대했던 것이 어른들의 마음이었다.
백세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묻는다. 과연 이 시대는 노년이 존중받는 시대인가, 아니면 고독사만이 늘어나는 시대인가?
나는 오늘도 황톳길을 걷는다. 그분과 나누었던 마지막 약속을 마음에 품고. 그리고 또 다른 길손을 만나기를 바란다. 이 길 끝에서, 누군가의 인생이 조금은 덜 외롭기를 바라면서.